브라흐마나는 항상 깨어 있으며 자신을 잘 다스리고 진리를 따른다.
깊은 지혜를 지니고 무엇이 바른 길이며 무엇이 그 길이 아닌지를 분명히 알며, 더없이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 그런 이를 나는 참된 바라문이라 부른다.

심층 주해

이 법구는 부처님께서 영취산에 계실 때, 케마 비구니와 관련하여 설하신 것이다. “어느 날 초저녁에 제석천왕이 여러 천신들을 데리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왔다. 그때 케마 비구니도 마음속으로 ‘내가 세존을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부처님 계신 곳에 자주 찾아가곤 하였는데, 그곳에서 제석천과 여러 천신들을 보게 되자 부처님께 예배한 뒤 물러났다. 제석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분은 누구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저이는 케마 비구니이다. 지혜가 으뜸이며, 무엇이 길이고 무엇이 길이 아닌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법구경 이야기》 제3권, 비엔찌에우, 354쪽 원문 인용)

이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은 우리가 무명과 번뇌에 휘둘리며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는 순간까지, 그 사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악업을 짓고 끊임없이 괴로움을 겪어 왔다. 우리는 속박된 노예가 되었고, 생사윤회의 고통스러운 굴레 속을 끝없이 헤매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비추어 줄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깨어나고, 지혜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곧 무명과 번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무명이 사라지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해탈이 열린다.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다. 한 번 뒤집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본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아직도 고통스러운 세상의 흐름 속을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 마치 가난한 방랑자가 거친 세상 속을 정처 없이 헤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나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귀한 보배를 되찾으려 한다. 더 이상 세상 풍파 속을 떠도는 방랑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혜의 찬란한 빛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더 이상 속박된 노예로 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케마 비구니의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를 분명히 구별하는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허망한 세상의 대상들에 속아 마음이 흐려지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끝없이 넓고 다함없는 생명의 근원과 하나가 된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

선(禪) AI 동반자

온라인

환영합니다. 저는 당신의 선(禪) AI 동반자입니다. 403 구절에 대한 사색을 돕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시거나 더 깊은 의미를 탐색하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