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흐마나는 자비를 베풀고 모든 생명을 사랑하며 평화를 유지한다.
이 세상에서 공덕과 허물이라는 두 굴레를 모두 넘어섰고, 근심이 없으며, 티 없고 청정한 이, 그런 이를 나는 참된 바라문이라 부른다.

심층 주해

이 법구는 부처님께서 뿝바라마에서 레와타 존자와 관련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을이든 숲이든”으로 시작하는 게송의 주석에서 자세히 전해진다. 어느 날 비구들이 법당에서 어린 사미 레와타의 이익과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오백 명의 비구를 위해 오백 개의 거처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비구들이 그 일을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레와타에게는 공덕도 없고 공덕 없음도 없다고 하셨다. 그는 그 둘을 모두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은 무거운 집착에서 생긴다. 사람들은 바깥 대상과 몸과 마음에 집착하며, 무엇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바깥 대상이 자기 밖에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꼭 붙잡는다. 자신이 만들고 소유한 물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가르침에서는 이를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이라 하며, 넓게는 아집과 법집이라 한다. 가장 무거운 것은 이 몸에 대한 집착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 몸을 참된 것으로 여긴다. 마지막 숨이 남아 있어도 몸을 붙잡으려 한다. 자기애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 몸을 잃자마자 다시 다른 몸을 찾는다. 바로 이 자기 집착 때문에 우리는 생사윤회를 계속한다. 대상과 몸에 대한 집착은 거친 집착이다. 이렇게 바깥의 거친 집착도 버리지 못한다면, 마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는 더욱 어렵다. 마음은 앎과 생각의 흐름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생멸의 연속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을 실재한다고 여긴다. 실재한다고 보기에 집착하고, 집착하기에 그 마음에 끌려 끝없이 달려간다. 이 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선과 악의 문제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선과 악은 세상의 모든 상대적 짝을 대표한다. 상대에 의지해 성립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참된 것이 아니다. 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선이 있기 때문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추함이 없다면 아름다움도 고정된 의미가 없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은 망상심이 세운 개념적 이름일 뿐이다. 모두 상대적 명칭이지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참되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림자를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 평생 그림자를 쫓아 잡으려는 사람을 지혜로운 이는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꿈속에 있는 사람은 꿈속 장면이 가짜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깨어나야만 꿈이 완전히 허망했음을 의심 없이 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부처와 성자가 아무리 말해도, 깨어나지 않으면 꿈이 허망하다는 것을 참으로 볼 수 없다. 깨어나면 현세의 모든 법이 환영과 같고 꿈과 같으며, 번개와 물거품과 지나가는 그림자 같음을 본다. 부처님께서는 레와타가 공덕과 공덕 없음 둘 다를 잘 놓아 버렸다고 하셨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공덕이 있다거나 공덕이 없다고 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만법의 공성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반야 지혜의 시야이다. 모든 법은 본성이 공하고,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자유롭고 걸림 없이 해탈한다. 반대로 그렇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대상에 묶여 오래도록 고통 속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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