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주해
앞의 네 게송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황금빛 물고기 카필라마차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설하신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먼 옛날 가섭불 시대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두 형제가 있었다. 장성한 뒤 두 사람은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형의 이름은 소다나였고, 동생의 이름은 카필라였다. 그들의 어머니 사디니와 누이 타파나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출가한 뒤 두 형제는 모두 사문의 본분을 다하였다. 어느 날 그들은 스승에게 출가자가 지켜야 할 중요한 본분이 몇 가지인지 물었다. 스승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배움이고 다른 하나는 선정 수행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은 굳게 마음을 내어 관수행에 전념하였고,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러나 동생은 삼장에 통달할 만큼 학문에는 전념하였으나 선정 수행은 하지 않았다. 그는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마음에 끌리고, 자신이 많이 배웠다는 교만에 빠져 계덕을 갖춘 장로들을 업신여겼다. 또한 무리를 만들어 파당을 세우고, 형의 충고도 듣지 않은 채 거만하게 행동하였다. 그 결과 카필라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
그 무렵 법의 추적을 받던 오백 명의 도둑들이 깊은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한 은자를 만나 의지할 곳을 청하였다. 은자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도덕에 의지하는 것보다 더 평안한 의지처는 없다. 너희는 오계를 지킬 수 있겠느냐?” 그들은 모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은자는 다시 타일렀다. “너희가 오계를 지키겠다고 서원하였으니, 이제부터 어떤 어려움이나 위협을 만나더라도, 설령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계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굳게 지키겠다고 맹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은신처를 알아내었고, 도둑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청정하게 계율을 지켰으므로 모두 하늘 세계에 태어났다. 여러 생을 거듭하며 하늘의 복락을 누리다가 그 복이 다하자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그들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던 시대에 같은 날 인간으로 태어났다.
한편 카필라는 지옥의 과보가 끝난 뒤에도 악업의 남은 과보로 인해 아치라바티 강의 물고기로 태어났다. 그 물고기의 몸은 황금처럼 빛났으나 숨결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났다. 어느 날 황금빛 물고기는 어부들의 그물에 걸렸다. 어부들은 이 희귀한 물고기를 보고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상히 여겨 그것을 부처님께 가져가 그 이유를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카필라가 가섭불 시대에 지은 전생의 일을 들려주셨다. 그는 참된 수행자들을 비방하고 욕한 악업을 지었지만, 경전을 독송하고 법을 설하며 부처님을 찬탄한 공덕이 있었기 때문에 물고기의 몸이 황금빛을 띠게 된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또 카필라의 어머니와 누이도 사문을 비방한 죄로 지옥에 떨어졌고, 오직 형 소다나만이 선정 수행으로 해탈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중은 크게 두려워하고 마음 깊이 감동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셨다. “항상 바른 견해 속에 살고, 항상 청정한 행을 닦는 이, 그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귀한 밝은 보배와 같다.”
애욕의 팔리어는 ‘탄하’로, 갈애·갈망·집착을 뜻한다. 애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애이다. 이는 오욕과 여섯 감각 대상에 사로잡혀 그것을 떠나지 못하는 탐욕이다. 둘째는 유애이다. 이는 몸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물질적 쾌락을 즐기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며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집착이다. 이런 견해는 윤회와 업보를 두려워하지 않는 단견에 가깝다. 셋째는 무유애이다. 이는 물질적 쾌락에 빠져 있으면서도, 다음 생에도 계속 그것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집착이다. 이는 상견에 가까운 견해이다. 때로는 유애를 색계에 대한 집착으로, 비유애를 무색계에 대한 집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애욕과 욕망은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이다. 대보적경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애착은 모든 번뇌의 근본”이라고 가르치셨다. 애착에서 욕망이 생기고, 욕망에서 근심이 생기며, 근심에서 괴로움이 생긴다. 이것이 모든 중생이 얽매이는 고통의 악순환이다. 십이연기에서 ‘애’와 ‘취’는 현재의 괴로운 과보를 불러오는 중요한 원인이다. 깊이 따져 보면 애욕 역시 허망하게 일어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참된 뿌리는 마음이다. 우리가 윤회와 괴로움의 뿌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애욕을 끊는 길밖에 없다.
이는 출세간의 길을 닦는 수행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곧 성문승, 보살승, 불승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해당한다. 반대로 인간과 천상의 선한 과보를 닦는 길에서는 애욕을 완전히 끊기 어렵다. 애욕에도 선한 욕구와 악한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 단계에서는 악한 욕망은 없애고 선한 욕구는 보존해야 한다. 선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복덕을 짓고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행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수행에 아무런 바람도 없다면 도의 과보를 이루기 어렵다”고도 말한다. 선한 욕구란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더 성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려는 고귀한 향상심이다. 그러나 출세간의 수행을 닦아 생사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한다면, 욕망과 애착을 모두 끊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끊임없이 사람을 끌고 다니며 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334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방일하면 갈애가 계속 자라난다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람의 탐욕과 갈망은 결코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른다. 깊은 바다는 잴 수 있어도 사람의 욕망에는 바닥이 없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담아도 채워지지 않고, 가져도 다시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이 탐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괴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는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참된 평안과 행복이 없다. 세상에서 큰 부를 가진 사람도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속은 늘 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계산과 걱정이 많고, 고요한 쉼을 얻기 어렵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으며, 있는 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맑고 평안할 수 있다. 행복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이 참으로 평안하고 욕망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니지 않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은 참된 행복을 누린다고 할 수 있다.
만족을 모르고 탐욕을 줄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세세생생 뻗어 가는 비라나 풀과 같고, 열매를 찾아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원숭이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원숭이가 가지에서 가지로 뛰며 열매를 찾듯이, 우리의 마음도 오욕과 여섯 감각 대상을 찾아 쉬지 않고 달린다. 원숭이가 더 이상 열매를 찾아 뛰지 않을 때 비로소 평안하듯, 우리의 마음도 여섯 감각 대상에 대한 집착과 추구를 멈출 때 비로소 참된 안락과 행복을 얻는다.
335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애욕에 묶인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이 비를 만난 비라나 풀처럼 계속 자란다고 말씀하셨다. 애욕은 생각에서 일어난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애욕도 생길 수 없다. 비라나 풀은 본래 번성하여 퍼지는 성질이 있는데, 거기에 비까지 내리면 더욱 무성해진다. 사람의 마음도 본래 욕망을 멈추기 어렵다. 여기에 매혹적인 물질적 대상이 더해지면 어찌 마음이 방일하고 탐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대상을 향해 탐내고 갈망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대상에 묶이고 조여든다. 그 속박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이 괴로움을 피하려면, 우리 안의 갈망과 탐욕의 씨앗을 서둘러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만 삶에 참된 평안과 행복이 생긴다.
336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항복시키기 어려운 애욕을 항복시킨다면, 근심과 괴로움은 연잎 위의 물방울처럼 저절로 떨어져 사라진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지만, 그 핵심은 ‘깨달음과 해탈’로 요약할 수 있다. 깨달음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해탈은 얽매임을 풀어 벗어나는 것이다. 그 풀림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번뇌와 얽힘이 있으며, 그 내적 얽힘의 뿌리가 바로 애욕이다. 애욕은 큰 결박이며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항복시키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승리자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용맹하고 빛나는 승리이며, 참된 해탈이다. 그때 모든 근심과 슬픔과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연잎 위의 물방울처럼”이라고 비유하셨다. 물방울은 연잎에 붙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대상이 더 이상 서로 얽매이지 않는다. 마음은 마음이고,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
337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애욕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풀을 뽑을 때 뿌리까지 뽑아야 하듯이, 애욕도 근본에서 뽑아내야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홍수를 만난 갈대처럼 악마에게 해를 입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애욕의 뿌리는 매우 깊고 두텁다. 그것을 뿌리째 뽑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수행자가 굳센 결의와 날카로운 지혜의 칼을 갖추지 못한다면 애욕을 끊기 어렵다. 우리는 흔히 약하여 애욕에게 지배당하고 부림을 당한다. 그것은 이번 생에서만 우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과거 생에서도 이어져 온 습기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뿌리가 깊고 두텁다고 말씀하셨다.
애욕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이 없는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잠복해 있을 뿐이다. 그 본질은 오래 익힌 습관적 힘이다. 평소에는 그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대상과 인연을 만나면 순경이든 역경이든 곧 모습을 드러낸다. 순조로운 대상 앞에서는 쾌락과 즐거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뜻에 맞지 않는 역경 앞에서는 거칠고 사나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것은 세상 전체를 뒤흔들 듯 폭발할 수 있다. 전쟁과 살육과 혼란도 결국 탐욕과 성냄의 결과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애욕의 악마를 직접 체험하고 분명히 보셨다. 그것은 물질적·생리적·심리적 욕구를 끊임없이 채우려 한다. 그러나 욕망을 어떻게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욕심의 그릇은 결코 다 차지 않는다.
사람은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파멸하고, 새는 먹이에 대한 탐욕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경계이다.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수많은 고통의 현실을 살펴보면, 결국 애욕이라는 악마를 이기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부처님께서 “홍수를 만난 갈대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해로움이 헤아릴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앞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교훈이 있다. 첫째, 두 형제는 모두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지만, 형은 관수행에 전념하였기에 해탈을 얻었다. 반면 동생은 학문에만 힘쓰고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식을 의지해 참된 수행자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타락하였다. 수행자가 철학적 연구와 이론적 지식에만 치우치고 실제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해탈의 길에서 참된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도둑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마음을 돌이켜 선지식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인간의 기본 도덕인 오계를 지키기로 굳게 서원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계를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 세계에 태어나 복을 누렸다. 반대로 카필라는 악한 원인을 지었기 때문에 아비지옥에 떨어졌고, 지옥의 과보가 끝난 뒤에는 악취 나는 황금빛 물고기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도 카필라의 말에 이끌려 파당을 만들고 악업을 지었기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았다. 이는 인과의 법칙이 결코 어긋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피하고 선을 닦으며, 항상 마음을 청정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현재와 미래에 좋은 과보를 누릴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큰 괴로움을 피하기 어렵다.
선(禪) AI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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