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욕은 끝없는 갈망의 시작이다. 애욕을 버리면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갈애를 좋아하고 여섯 감각의 대상을 좇아 달려간다. 비록 평안을 구한다고 해도, 결국 생사윤회의 흐름 속을 맴돌게 된다.

심층 주해

이 여섯 게송은 부처님께서 죽림정사에서 어린 암퇘지의 인연 이야기를 계기로 설하신 것이다. 어느 날 세존께서 왕사성으로 탁발하러 들어가시다가 어린 암퇘지 한 마리를 보셨다. 그 암퇘지는 늘 더러운 곳에서 뒹굴며 살고 있었다. 이를 보신 부처님께서 미소를 지으시자, 그 이에서 광명이 비쳤다. 존자 아난은 부처님께서 왜 웃으셨는지 여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어린 암퇘지의 전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카쿠산다 부처님 시대에 이 암퇘지는 어느 수행처 가까이에 살던 암탉이었다. 그 암탉은 한 비구가 수행 주제를 염송하는 소리를 집중해 들은 공덕으로 그 생을 벗어나 왕궁에 태어나 우바리 공주가 되었다. 어느 날 공주는 변소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마음이 고요해져 초선에 들었다. 공주의 생이 다한 뒤에는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으나, 이후 많은 악업을 지어 마침내 이 어린 암퇘지로 태어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이 인연을 분명히 알기에 웃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아난 뒤를 따르던 여러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마음이 움직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신 뒤, 갈애의 어리석음과 위험을 설명하시고 이 게송들을 설하셨다. 그 어린 암퇘지는 훗날 열세 생을 거듭 윤회하며 때로는 축생으로 떨어지고 때로는 부유하고 존귀한 인간으로 태어났다. 어느 생에서는 대신의 아내가 되었는데, 어느 날 아눌라 장로가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그녀를 보고 비구들에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저 어린 암퇘지가 이제 라쿤타카 아팀바라 대신의 부인이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여러 전생을 모두 기억하고 숙명통을 얻었다. 그 뒤 세속을 떠나 출가하여 비구니 판차발라카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여러 생 동안 윤회하며 겪은 일을 대중에게 차례로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녀는 ‘여러분은 각자 스스로 바른 알아차림과 정진으로 해탈에 이르십시오’라고 권하였다. 사부대중은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 그 뒤 그녀는 열반에 들었다. 이것이 이 인연 이야기의 대략이다. 제338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애욕을 끊는 일을 나무를 베는 일에 비유하셨다. 나무가 다시 싹을 틔우지 않게 하려면 뿌리까지 완전히 뽑아야 한다. 뿌리가 남아 있으면 나무는 계속 새싹을 낸다. 애욕을 끊는 일도 이와 같다.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다시 태어남을 벗어날 수 있다. 아무리 미세한 욕망의 한 생각이라도 남아 있으면 생사윤회 속에서 다시 태어남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고통스러운 재생을 끝내고자 하는 수행자는 애욕의 뿌리를 철저히 뽑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제339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서른여섯 줄기의 거센 갈애의 물결에 휩쓸려 불선한 길로 떠밀려 간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서른여섯이라는 수는 많은 갈래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경전에서는 흔히 여섯 감각기관, 여섯 대상, 여섯 의식을 합하여 열여덟 세계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부처님께서 서른여섯을 말씀하신 것은 갈애가 감각기관과 대상에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여섯 감각기관과 여섯 대상을 합하면 열둘이고, 이것을 과거·현재·미래의 세 시기에 적용하면 서른여섯이 된다. 더 넓게 말하면 감각기관, 대상, 의식이 서로 조건 지어 결합할 때, 분별의 에너지가 생겨 갈망과 집착을 자극한다. 우리의 삶은 늘 이런 갈애의 흐름에 지배된다. 그것들은 우리를 여러 방향으로 끌고 다닌다. 눈이 형상을 만나면 곧 좋고 나쁨을 분별한다. 좋으면 탐착하고, 싫으면 미워한다. 둘 다 마음의 불안과 괴로움을 낳는다. 마음에 드는 대상은 강한 끌림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따라가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각적 욕망 때문에 파멸하는가. 여기서 형상이란 물질적 대상을 넓게 가리키며, 그 안에는 사람의 아름다움도 포함된다. 오늘날에도 이루어지지 못한 욕망과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들이 많다. 욕망이 폭포수처럼 거세게 불어나면 그것을 막기 어렵고, 억누르려 하면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 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자녀들이 흩어지는 것도 감각적 욕망과 집착의 요구를 바르게 다루지 못한 결과이다. 소리에 대한 욕망도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여러 종류의 음악과 소리에 빠져 먹고 자는 것까지 잊고 몸과 마음을 망치는 사람이 있다. 애절한 선율 하나가 마음을 뒤흔들어 그리움과 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옛 이야기들에서도 수행자들이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고 선정과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고 전한다. 재물, 색, 명예, 음식, 잠, 또는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이라는 다섯 욕망과 여섯 대상을 살펴보면 그 해로움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감각기관과 대상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문제는 의식이 의도를 일으켜 분별하는 데 있다. 의식이 좋고 나쁨을 가르기 때문에 사랑과 미움이 생기고, 그것이 생사의 고통 속에 묶이는 시작이 된다. 제340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갈망과 욕망의 해로움을 더욱 분명히 강조하셨다. 사람의 욕망은 한계가 없어, 땅 위에 널리 퍼지는 잡초와 같다. 욕망은 더 가지려 할 뿐 줄어들려 하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 해도 마음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가난한 걸인이 부를 갈망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왕과 권력자들의 야망은 또 얼마나 큰가. 둘의 갈망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겉모습만 다를 뿐, 하나는 가난한 걸인이고 하나는 부유한 걸인일 뿐이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구할 때 사람들은 그 희망 속에 이미 실망의 씨앗이 숨어 있음을 잊는다. 실망이 있으면 슬픔과 괴로움이 따른다. 많이 구하는 사람일수록 많이 괴로워한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 하며, 인간의 여덟 가지 큰 고통 가운데 하나로 든다. 괴로움을 줄이고자 한다면 불자는 욕망을 줄여야 한다. 더 높은 길은 그 뿌리를 완전히 끊는 것이다. 그래야 참된 평안과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제341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애욕이 무거운 사람의 위험을 밝히셨다. 애욕에 깊이 묶인 사람은 여섯 대상에 매달리고 그것을 좇아 달려간다. 비록 마음으로는 평안을 구한다고 해도 결국 윤회의 깊은 흐름 속을 맴돌게 된다. 부처님의 말씀을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의 삶에는 많은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경과 괴로움이 닥치면 우리는 세속의 즐거움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오직 그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통이 지나가면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을 잊고, 다시 욕망과 쾌락에 빠진 옛 마음으로 돌아간다. 열반이 평안하고 행복하며 모든 괴로움을 꺼뜨린다고 들으면 그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세상의 감각적 즐거움 또한 놓지 못한다. 이는 강 한가운데서 갈팡질팡하다 죽는 개의 처지와 같다. 어떤 사람이 개를 데리고 강가를 걷고 있었다. 개는 건너편에서 풍겨 오는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주인을 버린 채 강을 건너려 했다. 그런데 강 한가운데 이르자 주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차마 주인을 떠나지 못해 돌아오려 했다. 막 돌아서려는 순간 다시 건너편의 향기가 풍겨 오자 또 그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다가 마침내 힘이 빠져 강 한가운데서 빠져 죽었다. 주인의 부름은 은혜와 도덕의 길을 비유하고, 향기는 오욕락과 여섯 대상을 비유한다. 결국 도덕의 길도 이루지 못하고 욕망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게 모순되어 있다. 끝내 우리는 그 개가 물리적인 강에서 익사하듯 생사의 강에서 가라앉는다. 제342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그물에 걸린 토끼의 비유를 드셨다. 애욕에 빠진 사람도 이와 같다. 토끼가 한 번 그물에 걸리면 몸부림쳐 벗어나고자 해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고, 결국 사냥꾼의 손에 죽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 욕망 없는 길을 구한다면 힘써 애욕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물에 걸린 토끼와 같은 처지가 된다. 애욕의 불길이 치솟으면 모든 것을 태운다. 먼저 자신을 태우고, 이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번져 간다. 참으로 두려운 것이 애욕이다. 지금의 사회를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과 욕망의 그물, 더 넓게는 오욕과 여섯 대상의 그물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쾌락을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다. 육체적 즐거움은 매우 덧없어, 기쁨이 지나가면 곧 괴로움이 뒤따른다. 순간의 쾌락을 탐하다가 평생 후회와 고통을 겪는 사람이 많다. 그 고통은 자신에게만 그치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욕락을 좇는 모습은 마치 나병 환자가 가려움을 달래려고 뜨거운 숯불 가까이 몸을 대는 것과 같다. 잠시 시원한 듯하지만 병은 그대로이며 날마다 더 깊어진다. 뿌리부터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애욕의 뿌리를 끊지 못하면 우리는 끝없이 생사의 바다에서 떠돌게 된다. 제343게송에서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서둘러 애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하셨다. 특히 출가자는 누구보다도 애욕을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물에 걸린 토끼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번뇌의 그물이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번뇌를 끊지 못하면 괴로운 업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자에게 생사의 괴로움을 늘 자각하고 힘써 애욕을 끊으라고 권하셨다. 앞의 인연 이야기는 우리에게 관찰 수행의 힘을 보여 준다. 어린 암퇘지는 닭으로 태어났을 때 한 비구가 수행 주제를 염송하는 소리를 집중해 들은 인연으로 왕궁에 태어나 공주가 되었다. 공주는 구더기들을 관찰하다가 마음이 고요해져 초선을 얻었다. 죽은 뒤에는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다시 어린 암퇘지로 태어나야 했다. 이처럼 초선을 얻었다 해도 그것이 완전한 보장은 아니다. 악업을 지으면 여전히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이 공정한 인과의 법칙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타락한다. 어떤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에 맞는 열매가 난다. 고추 씨를 심고 오렌지나무가 자라기를 바랄 수는 없다. 여러 생 동안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겪었지만, 약간의 복덕이 있었기에 그 암퇘지는 한 생에서 대신의 부인으로 태어났다. 비록 부귀와 권세 속에 살았지만, 수행을 이룬 한 장로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전생을 말해 주는 것을 듣고 곧 깨어나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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